꿈 깃든 이야기

원칙주의로 하버드대 농구팀의
역사를 새로 쓰다

토미 아마커 하버드대 농구팀 감독

꿈 깃든 이야기

원칙주의로 하버드대 농구팀의 역사를 새로 쓰다

세계 최고의 대학이지만 운동에서는 만년 하위권인 하버드대. 일명 ‘공부벌레’들이 모인 하버드에서 지난 2012년 대이변이 일어났다. 미국 대학농구에서 만년 하위 팀이던 하버드대 농구팀이 3월 열린 미국 대학농구(NCAA)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진출한 것이다. 66년 동안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진출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자 미국 전체가 들썩였다.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만 여겼던 하버드대 농구팀의 토너먼트 진출은, 바로 감독 토미 아마커의 뛰어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로선수 대신 지도자의 길을 택하다

하버드대 농구팀은 항상 꼴찌팀으로 여겨졌다. 스탠퍼드대나 듀크대 등 다른 명문대와는 달리 체육특기자 장학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운동 유망주가 하버드대에 들어가더라도 까다로운 학사과정을 밟아가며 엘리트 운동선수 활동을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하버드대는 미국 대학농구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매번 패배한 후 쓸쓸히 퇴장하고는 했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2012년 미국대학 챔피언십 토너먼트(이하 ‘NCAA’)에 진출했고 이는 미국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 큰 성과가 아닐 수 있지만, 다른 대학 농구팀의 선수들은 프로입단을 앞두고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아마추어팀이라고 할 수 있는 하버드대가 NCAA에 진출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는 하버드대 농구팀을 맡은 토미 아마커의 역할이 컸다. 어릴 때부터 농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어머니의 지원 아래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농구명문으로 유명한 듀크대에서 포인트가드로 활약한 그는 1988년 대학을 졸업한 후 프로선수로 활약하는 대신 지도자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은사이기도 한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 밑에서 듀크대 코치를 맡기로 한 것이다. 슈셉스키 감독은 1980년부터 무려 32년 동안 듀크대를 미국 대학농구의 최고봉에 올려놓은 인물로, 아마커는 그의 밑에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배우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춰갔다. 1977년에는 뉴저지주 시트홀대학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시튼홀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그는 2001년 농구명문인 미시간대로 옮겨 감독생활을 지속해나갔다. 지도자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미시간대 농구팀이 몇 년 동안 부진한 성적을 내게 되면서 2007년에 경질되는 시련을 겪었다.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하버드대였다. 만년 꼴찌에 우승은커녕 미국 대학농구 토너먼트 진출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최약체 대학 농구팀. 이미 한 번 경질된 경험이 있는 그가 최약체인 하버드대 농구팀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학업과 운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하버드대 농구팀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 역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그의 친구들은 하버드대에 농구팀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감독으로서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행운이다. 기본 실력이 받혀줘야 감독이 원하고 지휘하는 바대로 따라와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실력이 부족한 선수들을 지휘한다는 것은 아예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버드대의 지휘봉을 잡은 아마커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을 마주했다. 선수들의 실력은 편차가 컸고 선배선수들은 불성실한 훈련태도를 보였다. 실력 있는 유망주가 들어온다고 해도 텃세로 인해 주전으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고 선수들에게 열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커는 결단을 내릴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농구팀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실력으로만 선수를 기용하는 원칙주의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농구팀 쇄신을 위해 신입생 위주로 팀을 구성한 것이었다.
선배선수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훈련도 강도 높게 실시했다. 훈련시간을 2배로 늘렸다. 선수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업에 지장이 있다는 선수들에게 “학업과 운동 모두 잡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 역시 듀크대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하며 경제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력이 있었다. 듀크대 코치로 활동할 때는 세계적인 명문 비즈니스스쿨인 듀크대 후쿠아 스쿨에서 경영학 석사 수업을 들었고, 하버드대 감독으로 부임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하버드대 법대교수나 유명 기업인들과 사회현상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런 아마커의 열정과 설득, 원칙주의에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변화는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커가 지휘봉을 잡은 후 8번째 경기에서 하버드대 농구팀은 대학농구계의 강팀인 미시간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버드대 농구팀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선수들이 믿고 따르는 위대한 감독

하버드대 농구팀은 점차 대학농구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13승 3패로 아이비리그 3위에 올랐다. 패배에 익숙해져있던 하버드대 농구팀이 승리를 맛보기 시작하면서 기세는 더욱 무섭게 올라갔다. 선수들의 자신감도 높아졌다. 2011년에는 프린스턴대와 아이비리그 대전 공동우승을 차지했고 2012년에는 아이비리그 대전에서 단독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드디어 NCAA 진출까지 이뤄냈다.

2013년에도 NCAA에 진출했고,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디비전 1 토너먼트 서부지구 64강전에서 강호 뉴멕시코대를 68-62로 제압했다. NCAA 64강전에 진출한 지 67년 만에 처음으로 감격스러운 승리를 맛본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하버드대 유니폼의 짙은 붉은색을 뜻하는 팀명인 ‘크림슨(Crimson)’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크림슨이 미국 대학 농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며 하버드대 승리를 비중 있게 전했다.

2014년에도 하버드대 농구팀은 NCAA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제 하버드대 농구팀이 NCAA에 진출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버드대 농구팀은 미국 워싱턴의 스포케인 아레나에서 열린 디비전1 토너먼트 동부지구 64강전에서 신시내티대를 61-57로 꺾었고 32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아마커가 발탁해 현재 NBA에서 활약 중인 제레미 린의 역할이 컸다. 대만계 미국인으로, 아시아계 선수라는 편견 때문에 주목 받지 못했던 그의 재능을 아마커가 발전하고 적극 지지해 준 것이다. 그런 아마커의 기대와 지지에 부응하듯 제레미 린은 하버드대 농구팀의 ‘공격의 핵’으로 활약하며 뛰어난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마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마커 감독은 진정한 리더다.
하버드대의 모든 선수가 감독을 믿고 따랐다.”
이렇듯 뛰어난 성과를 보인 아마커에게는 스카웃 제의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당시 마이애미대가 하버드대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했지만, 아마커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은 하버드에 있어야 할 때다.
아직 하버드대 농구팀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지 못했다”
하버드대가 NCAA 챔피언십 진출을 확정짓던 날 하버드대 농구팀 주장인 올리버 맥날리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쓰느라 밤을 새워야 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로,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선수자격을 박탈하는 하버드대. 그러한 상황에서도 선수들을 독려하며 강한 리더십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아마커는 하버드대, 그리고 미국 대학농구 역사에 하나의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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